국립묘지 안장거부처분 취소청구
요지
청구인은 참전유공자인 고(故) 김○○의 자녀로서, 고인이 사망하자 피청구인에게 고인을 국립이천호국원에 안장하여 줄 것을 신청하였으나, 피청구인은 고인이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하는 자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국립묘지 안장거부처분을 한 바, 「참전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2조제2호에 따른 참전유공자로서 사망한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하도록 되어 있고, 국립묘지 안장 신청을 받은 국가보훈처장은 안장 등의 대상으로 신청된 사람이 ‘금고 1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와 ‘국가보훈처장과 국방부장관이 협의하여 정하는 바에 따라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한다고 인정된 사람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국립묘지안장대상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의뢰하고, 동 위원회로부터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한다고 인정된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국립묘지 설치ㆍ운영법 제23조, 같은 법 시행령 제26조제2호에 따르면, 국가보훈처장은 같은 법 제12조에 따른 안장 등의 신청서 접수, 안장대상 여부의 확인ㆍ결정ㆍ통보에 관한 권한을 국립묘지관리소장에게 위임한다고 하고 있다. 고인은 당시 징집대상인 제2국민병의 소집연령에도 못미치는 만 13세의 나이에 중학교 학생의 신분으로 학도의용군에 자원하였던 점, 인우보증인인 김○○은 고인이 육군 제2사단 제○○포병대대에 소속되어 참전하였다가 중공군의 피격을 당한 후 휴가명령을 받아 서울 집에 기거하던 중 뒤늦게 복교령을 전해 듣고 학교로 돌아가게 된 것이라고 진술하였는데, 고인이 부대장의 휴가명령에 따라 이남하였다가 2년 전에 대통령의 복교조치 담화발표 및 복교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부대에 다시 복귀하지 아니한 채 복교한 것을 들어 국방의 의무를 해태하였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탈영 후 일보 삭제’ 기록 외에 고인이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하였다고 볼 만한 객관적인 사실이 입증되지도 아니하였으므로, 피청구인의 이 사건 처분은 위법ㆍ부당하다.
해석례 전문
1. 사건개요 청구인은 참전유공자인 고(故) 김○○(이하 ‘고인’이라 한다)의 자녀로서, 고인이 2013. 9. 16. 사망하자 2014. 2. 8. 피청구인에게 고인을 국립이천호국원에 안장하여 줄 것을 신청하였으나, 피청구인은 고인이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하는 자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2014. 4. 21. 청구인에게 국립묘지 안장거부처분(이하 ‘이 사건 처분’이라 한다)을 하였다. 2. 청구인 주장 가. 고인은 ○○공업중학교 재학 중에 서울학도의용군으로 자원하여 육군 제7사단18포병대대에 배치되었고, 1952년 10월경 강원도 금화지구 오성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여 지휘부로부터 1주일의 휴가명령을 받고 휴식을 취하던 중, 육군 헌병부대로부터 1951년 3월경 6ㆍ25전쟁에 동원된 학생들에게 복교하라는 내용의 복교령이 발령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18포병대대장에게 이 사실을 통지하였다. 나. 따라서 고인이 1953. 3. 26. 이후 군에 복귀하지 아니하였음을 이유로 한 피청구인의 이 사건 처분은 취소되어야 한다. 3. 관계법령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하 ‘국립묘지 설치ㆍ운영법’이라 한다) 제5조, 제23조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13조, 제26조 4. 인정사실 당사자 간에 다툼이 없는 사실과 청구인과 피청구인이 제출한 행정심판청구서, 답변서, 진정서, 탄원서, 국가유공자증서, 호국영웅기장증, 이장신청서, 병적조회결과, 국립묘지 안장신청자 병적사항 확인결과 회신, 국립묘지안장대상심의위원회 심의결과, 이 사건 처분서 등의 내용에 따라 인정되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가. 1950. 11. 15. 고인은 육군에 입대하였고, 1953. 3. 26. 병장으로 전역하였으며, 2001. 7. 16. 참전유공자로 등록된 자이다. 나. 2013. 9. 16. 고인이 사망하자 2014. 2. 8. 청구인은 고인을 국립이천호국원에 안장하여 달라고 신청하였다. 다. 안장심사 병적조회 결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라. 2014. 2. 10. 피청구인은 국립묘지 설치ㆍ운영법 제5조, 제22조에 따라 국가기록원장 및 ○○지방검찰청 여주지청장에게 고인의 범죄경력 조회를 의뢰하였고, 2014. 2. 20. 국가기록원장은 피청구인에게 ‘고인에 대한 해당기록 확인 안됨’이라고 회신하였으며, 2014. 2. 21. ○○지방검찰청 여주지청장은 다음과 같이 회신하였다. - 다 음 - ○ 귀 원에서 요청한 대상자에 대한 범죄경력(금고 이상의 실형)을 검찰청 사건조회 권한을 이용하여 조회해 본 바 해당 없음을 회신합니다. (단, 1985. 1. 1. 이전 사건은 검색 불능) 마. 2014. 2. 24. 육군참모총장은 피청구인에게 고인의 병적확인결과를 다음과 같이 회신하였다. - 다 음 - * 본적, 수형 및 강등기록 없음 바. 2014. 4. 16. 피청구인은 국가보훈처장에게 고인을 비롯한 61명의 대상자에 대하여 국립묘지 설치ㆍ운영법 제5조제4항제5호의 규정에 따른 영예성 훼손여부 심사를 위한 제안서를 제출하였는데, 제안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다 음 - ○ 의제 : 국가보훈처장이 심의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탈영)로서 국립묘지 안장대상 여부 판단 ○ 제안관련 사항 - 병적기록 확인결과 <2014. 2. 24. 육군본부 병적관리과> : 입대 및 전역일자 : 1950. 11. 15. - 1953. 3. 26. 탈삭(병적 말소) * 탈삭일 이후 기록 없음 - 유족탄원 내용 : 고인께서는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15세의 어린 나이에 자원입대하여 온갖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싸우셨고, 휴전회담이 진행되던 전쟁 막바지에 학교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귀가한 것일 뿐, 병적말소로 전역 처리한 것은 당시 혼란스러운 국가행정의 착오로 판단됨. 국가를 위해 자원한 호국영웅을 탈영자로 폄하하는 것은 너무 가슴 아픈 일이며, 마지막까지 사회를 위해 자신의 시신을 기증하고 국립묘지에서 잠드시길 희망하신 고인의 명예와 희생정신을 회복할 수 있도록 정확한 심의를 당부함 ○ 참고사항 - 이장신청자 - 수형사실 없음 <2014. 2. 27. 육군본부 고등검찰부> 사. 2014. 4. 18. 국가보훈처장은 피청구인에게 ‘국립묘지안장대상 심의결과 고인은 안장 비대상자로 의결하였다’고 회신하였다. 아. 2014. 4. 21. 피청구인은 청구인에게 국립묘지 설치ㆍ운영법 제5조제4항제5호, 같은 법 시행령 제13조에 따라 이 사건 처분을 하였다. 자. 청구인이 우리 위원회에 제출한 김○○(34○○○-10○○○, 군번 ○○○)의 인우보증서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 다 음 - ○ 김○○은 1950. 10. 20. ○○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에 서울학도의용군에 자원하여 고인 등 300여명의 중ㆍ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북진하는 육군 제○○사단 ○○포병대대에 배치되었고, 평양시 영변을 거쳐 ○○산 가까이 진격하며 중공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전선에서 11월 26일 중공군 총공세때 포위되었다가 탈출하여 귀대 후 1953년 7월 휴전 때까지 강원도 ○○지구에서 전선에서 활약함 ○ 고인은 김○○과 같이 육군 제2사단 ○○포병대대 ○포대에 소속되어 105mm ○○포 분대장으로 활약하였는데, 1952년 10월경 강원도 ○○○구 ○○산(1300 고지 ○○군 점령지역) 남측 산악지역에서 휴전선에 유리한 지형확보를 위한 전투 중에 중공군의 집중피격을 당하였고, 군 지휘부에서는 피해를 입은 부대원들에게 1주일의 휴가명령을 내려 고인은 서울 집에서 휴가 중 육군 헌병부대로부터 복교령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음 ○ 1951년 3월 이○○ 대통령이 6.25전쟁 때 동원된 학생들에게 학교에 복교하라는 훈령이 내렸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소속 부대 ○○포병대대장에게 이 사실을 통지하고 이후 고인은 서울에서 학업을 계속했으며 탈영 등의 기록은 사실이 아님 ○ 이승만 대통령은 1951. 3. 16. “국가의 앞날을 짊어질 청년 학도들은 시급히 학원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고, 그 내용은 ‘1) 모든 학도는 원래의 본분인 학업으로 돌아갈 것, 2) 군 복무로 학업이 중단된 학도는 군복무 사실이 인정되면 학교 당국은 무조건 복교를 인정할 것, 3) 군 및 각급 학교는 군 복무로부터 복교하는 학도들에게 특별 배려를 해줄 것, 4) 군복무 중 학년 진급이 누락된 학도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진급을 인정할 것’임 차.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한 「6ㆍ25전쟁 학도의용군 연구」 및 육군본부의 「한국전쟁시 학도의용군」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959년 공포된 병역법과 그 시행령에 따르면 ‘학도의용군’이란 1950. 6. 29. 이후 ‘학도의용군’으로 육해공군 또는 유엔군에 예속되어 1951. 2. 28. 해산할 때까지 근무한 자로서, 전투에 참가하고 그 증명이 있는 자(단, 전상(戰傷)으로 인하여 중간에 나온 자를 포함)를 말함. ○ 육군본부에서 발간한 공간사 「6ㆍ25전쟁 학도의용군 연구」에서 제시한 학도의용군의 범위와 대상은 ① 참전활동에 나선 사람들의 신분이 학생신분이고, ② 이들의 참전활동은 징집이 아닌 자원에 의한 것이며, ③ 전투와 관련된 모든 활동이며, ④ 이들이 국군, 유엔군 등 국가기관은 물론 경찰, 독립유격대 등에서 활동한 것도 인정되며 ⑤ 활동시기에 대해서는 6ㆍ25전쟁 발발로부터 1951년 4월까지 전쟁 초기 10개월간으로 제한하였음. 이에 대한 근거로는 비상학도대가 결성된 1950. 6. 29.을 시작으로 하고 활동종결 시기는 1951. 3. 16.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학생 학교복귀지시 담화’가 있은 날로 하되, 육군본부 정훈공작대의 실제 해산일인 1951. 4. 3.을 준용하였음. ○ 정부 수립 후 최초의 병역관계법은 병역임시조치령(1949. 1. 20. 대통령령 제52호)로서 「병역법」 공포시까지의 한시적 법령인데 이 법은 병력 충원에 있어 모병원칙을 취하여 매년 만 17세 이상 만 28세까지의 자로서 군사교육이나 청년단체에서 훈련을 받은 자 중에서 모집하게 되어 있었으며, 이후 공포된 「병역법」(1949. 8. 6. 법률 제41호)은 의무적인 징병제도와 자유선택에 의한 지원병제도를 병용하여 매년 만 20세에 달하는 자는 징병검사를 받도록 하고 호국병, 제1보충병의 순으로 징집하게 되어 있었음. ○ 정부는 1950년 7월부터 제2국민병(만 17세부터 만 40세까지의 남자)소집을 결정하고, 1952. 9. 5.부터 제2국민병 소집과 아울러 징집을 개시한 때부터 1955. 8. 31. 제2국민병 소집이 종결되고 「병역법」상의 징집제도가 제대로 시행되기까지는 병무행정의 미비ㆍ급속한 신병충원의 필요성 때문에 청년들을 강제 소집할 수밖에 없던 다급한 상황이었는데, 학도의용군들은 학생신분으로서 징집연기의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제2국민병의 소집 연령에 미달한 경우도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참전하였음. ○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을 시작하면서 많은 포병부대가 창설되었는데, 제18포병대대는 10월 중순 서울시내에서 학도포병의용대를 모집하기로 결정하였고, 모집책임을 맡은 최철 대위는 “전쟁은 3 - 4개월이면 끝날 것이다”라고 하면서 학생신분으로 참전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제○○포병대대는 용산중학교에서 신체검사와 구술시험을 치른 후 학도 포병의용대원 341명을 최종 선발하여 같은 해 10. 193. 부대를 편성하였음. 이들은 중학교 5학년에서 6학년(17-18세)이 가장 많았고, 16세도 있었으며 용산중학, 서울중학, ○○상업, 서울공업, 대광중학 등 서울시내 소재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음. 이들은 용산중학교 교실에 수용되었다가 10. 18.과 10. 20. 2진으로 나뉘어 군복도 지급받지 못하고 교복에 교모를 쓴 채로 전선에 투입되었으며, 이후 부대를 재편하여 전원을 70 - 80명 정도씩 각 포대로 할당을 했고 각 포대에서 인사기록을 작성한 후 그 기록을 토대로 입영절차를 마쳤으므로 일부 대원들은 자신들에게 군번이 부여된 것을 알았지만 대부분은 자신들이 정식으로 군에 편입되는지는 모르고 있었음. 군번은 같은 해 11월 중순에 나왔으나, 이들이 자신의 군번을 확인하게 된 것은 덕천에서 철수하여 서울에 재집결한 후였는데, 이들 학도의용군들은 당시 현역병으로 편입되어 수년간 군복무를 하여야만 하였으며 생존자의 절반정도는 종합학교로 들어가 갑종후보생으로 임관하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하사관으로 복무하였음. 전쟁이 끝났으나 현역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전역이 쉽지 않았고 1951년 2월말 공포된 학도병 복교령도 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으므로 이들이 전역할 수 있었던 시기는 이로부터 5 - 6년이 지난 1955년이나 1956년 정도였고, 이들의 계급은 이등상사나 일등중사였음. ○ 1951. 2. 28. 정부는 개전 초기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크게 기여한 학도의용군에 대해 해산명령을 하였고, 같은 해 3. 16.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학생 학교복귀 지시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이에 따라 같은 해 4. 3. 국방부 정훈국의 정훈공작대가 공식 해산하였음. 그러나 정부의 해산명령이나 복교담화를 들은 부대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1951년 2월말과 3월초는 학도의용군으로 지원한 학생들 중 대부분이 이미 군번을 부여받고 현역으로 복무중이었으므로 학교로 복귀할 수 없었으나, 국방부와 육군본부에 의해 별도로 관리되던 정훈공작대와 같은 일부 단체는 정부의 조치에 의해 학교로 복귀할 수 있었음. 카.「국립묘지안장대상심의위원회 운영규정」(국가보훈처 훈령 제956호) 제4조제1항제4호에 따르면, 국립묘지안장대상심의위원회는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를 받고 그 형이 확정된 사람(가목), 그 밖에 국가보훈처장 또는 국방부장관이 안장대상심의위원회에서 심의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나목) 중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에 국립묘지 설치ㆍ운영법 제5조제4항제5호의 규정에 따른 영예성 훼손여부를 심의ㆍ의결한다고 하고 있고, 위 ‘영예성 훼손여부’는 ‘과실의 경중 또는 우발적인 행위여부(제1호), 상대방이 입은 피해의 경중 또는 생계형 범죄여부(제2호), 피해자와 합의 및 변제 등 적극적인 피해구제 노력여부(제3호), 입대 이전 범행여부(제4호), 안장대상자 자격요건 취득(유공시점 기준) 이전 범행여부(제5호), 사면ㆍ복권 여부(제6호), 병적말소, 행방불명 및 전역사유 미확인자 등 병적사항 이상 여부(제7호), 국가적ㆍ사회적 법익에 반하는 범죄로써 큰 피해를 발생시켰는지 여부(제8호), 누범ㆍ상습범인지 여부(제9호), 국가ㆍ사회에 기여한 정도(상훈법에 따른 훈ㆍ포장자, 정부 표창규정에 따른 표창자, 상이정도, 전쟁 참여 등)(제10호)’와 같은 정상참작 사유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심의ㆍ의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타. 육군기록정보관리단은 우리 위원회에 고인과 인우보증인인 김○○의 병적대장, 인사명령지사본을 제출하였는데, 위 자료에 따르면 고인(당시 성명 : 김○○, 군번 ○○○)과 김○○(하사, 군번 ○○○)은 보병 제2사단 포병단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파. 청구인이 우리 위원회에 제출한 고인의 학적부에 따르면, 고인은 1953. 4. 6. 서울 성남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56. 2. 25. 졸업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5. 이 사건 처분의 위법ㆍ부당 여부 가. 관계법령의 내용 1) 국립묘지 설치ㆍ운영법 제5조제1항제4호나목 및 제4항제5호, 같은 법 시행령 제13조에 따르면, 「참전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2조제2호에 따른 참전유공자로서 사망한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하도록 되어 있고, 국립묘지 안장 신청을 받은 국가보훈처장은 안장 등의 대상으로 신청된 사람이 ‘금고 1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와 ‘국가보훈처장과 국방부장관이 협의하여 정하는 바에 따라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한다고 인정된 사람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국립묘지안장대상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의뢰하고, 동 위원회로부터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한다고 인정된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2) 국립묘지 설치ㆍ운영법 제23조, 같은 법 시행령 제26조제2호에 따르면, 국가보훈처장은 같은 법 제12조에 따른 안장 등의 신청서 접수, 안장대상 여부의 확인ㆍ결정ㆍ통보에 관한 권한을 국립묘지관리소장에게 위임한다고 하고 있다. 나. 판단 위 인정사실에 따르면, 고인은 당시 징집대상인 제○국민병의 소집연령에도 못미치는 만 13세의 나이에 중학교 학생의 신분으로 학도의용군에 자원하였던 점, 인우보증인인 김○○은 고인이 육군 제○사단 제○○포병대대에 소속되어 참전하였다가 중공군의 피격을 당한 후 휴가명령을 받아 서울 집에 기거하던 중 뒤늦게 복교령을 전해 듣고 학교로 돌아가게 된 것이라고 진술하였는데, 청구인이 제출한 자료 및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발간자료 등에 따르면 1951년경 대통령의 종군학생 복교조치 담화가 있었던 사실이 확인되고 인우보증인의 위 진술내용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이는 점, 청구인이 학도병에 자원하였던 시기에는 해방 후 병력이 정비되기 전에 전쟁이 발발하여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학도병의 소집 이후 대대의 사정에 따라 입영절차를 진행할 수밖에 없어 군번이 부여된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많았으며, 군번이 부여되지 아니한 채 학생 신분을 유지하다가 대통령의 복교조치에 의해 복교하기도 하는 등 학도의용군의 모집 및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던 점, 고인이 소속한 포병대대는 주로 서울 시내에 소재한 중ㆍ고등학교 학생들이 자원하여 편성되었는데, 정식 군사교육이나 훈련 없이 참전하였고 학교로 복귀할 당시까지 제○국민병 소집연령에도 못미치는 만 15세에 불과하였던 고인으로서는 현역병의 신분을 취득하게 된 사실 및 그 의미에 대하여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28개월간 복무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고인이 부대장의 휴가명령에 따라 이남하였다가 2년 전에 대통령의 복교조치 담화발표 및 복교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부대에 다시 복귀하지 아니한 채 복교한 것을 들어 국방의 의무를 해태하였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탈영 후 일보 삭제’ 기록 외에 고인이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하였다고 볼 만한 객관적인 사실이 입증되지도 아니하였으므로, 피청구인의 이 사건 처분은 위법ㆍ부당하다. 6. 결 론 그렇다면 청구인의 주장을 인정할 수 있으므로 청구인의 청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재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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