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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법사학연구2007.04 발행KCI 피인용 4

日帝强占初期 判例에 나타난 상행위(객주업)상 高利貸의 역사적 평가

A historical estimation of the high rate of interest in the commercial transaction(Gaek-ju's business) appreared in the early judicial case during the Japanese compulsory occupation of Korea

전우현(명지대학교)

35호, 109~146쪽

초록

일제강점초기 두 건의 조선고등법원 판례는 상행위(객주업)상 고리의 소비대차와 상호계산에 관한 쟁점을 보여주고 법원은 당시 조선의 상관습상 월 3푼의 이자가 객주영업상 존재하였는가를 중심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하고 있다. 이 사례는 조선의 이자율 관행 뿐만 아니라 일제가 조선에 진출한 시기부터 시작된 고리대의 상관습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판례평석을 하기보다 이 두 시기의 고리대 현상을 집중적으로 고찰함을 목표로 하였다. 조선시대의 公債와 私債에 관한 규정은 경국대전 등에 나타나고 있고 당시의 소비대차는 관청이나 공공단체기관이 대부한 公債와, 官吏가 사사로이 대부하거나 土豪 기타 상인이 대부한 私債로 구분할 수 있다. 私債에는 방납인의 고리대, 객주 및 여각의 금융, 장변시변낙변 등이 모두 해당하고 상부상조의 정신에서 출발한 도 모두 이 범주에 해당한다. 경국대전등 조선의 법전은 公債 연 1할, 私債 월 1푼연 5푼 등 최고이율을 정해두고 있었으나 이러한 규정은 잘 준수되지 않았다. 私債에서 대금업자의 금리는 통상 월 3푼정도였다고 하나, 그러한 금리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 월 5푼이나 6푼 또는 그를 초과하였다. 심지어 월 이자만으로도 원금을 초과하는 甲利라고 하는 高利債도 존재하였다. 조선의 성리학적 도덕관념은 실질 경제생활과 모순되었고 그러한 모순된 구조하에서 高利의 殖利는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과잉의 인구에 비해 생산력은 미흡했으므로 궁핍한 생활이 전반적으로 상례화된 점도 이러한 가렴주구를 부채질하였으며 法治主義를 외면한 유교이념에도 근본적인 문제가 잠재되고 있었다. 조선후기에 이를수록 과전법등 토지제도와 조세수취체제의 모순이 격화되어 고이율의 소비대차가 심해지고 公債보다 私債가, 도시보다 지방이 高利債의 고통이 가중되었고 환곡의 폐단까지 나타나게 된다. 이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너뜨리고 통감부, 총독부를 통한 조선침략을 구체화하자 日商등 외국인에 의한 고리의 소비대차가 官廳의 비호하에 노골화하였다. 대한제국기와 일제가 조선을 본격적으로 강점하기 시작한 시기에는 이러한 고리대업자가 증가함에 따라 한국인은 농토와 가축을 저당물로 하고 채무자가 영세화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전에 일본인은 한국에서 일본의 식량조달을 위한 방법으로 토지를 매입하였으나 이후에는 고리대자금을 방출하고 미상환자에 대한 강제집행을 통해 토지소유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日人들은 춘궁기에 絶糧農民을 대상으로 자금을 방출하였는데 농민들이 추수 후에도 상환능력이 없으면 유저당이 되었다. 특히 일본상인들은 貸付 전에 先利子를 받거나 5인조 連帶保證制度를 활용하기도 하였다. 統監府가 설치된 이후 객주는 독점적 지위를 상실하였으나 기존의 객주업자 뿐만 아니라 시전상인, 관료출신들이 가세하여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이들은 근대적인 의미의 회사형태를 유지하지 못하여 개인상인의 영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대체로 오래 가지 못한 점에서 본 판례상 나타난 客主는 조선왕조와 일제 강점초기 高利의 상관습을 반영하는 말기적 態樣인 것으로 평가된다. 본 조선고등법원 판례에서 월 3푼의 고리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객주업은 조선의 대표적 私商이라는 전통적 요소를 내포하면서도 개화기 일본자본의 침투과정에서 近代化合資化되어 갔다는 점에서 객주의 貸借關係에 대한 고찰은 봉건주의 조선의 전통적 대차관계와 개화기 일제의 자본침투 과정을 통시적으로 음미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제어] 高利의 消費貸借와 相互計算, 客主의 貸借關係, 朝鮮時代의 公債와 私債, 日帝强占期의 私商

Abstract

I have observed the high rate of interest in the commercial transaction(Gaek-ju's business) in the early two judicial cases during the Japanese compulsory occupation of Korea. They are the cases of the loan of consumption and the mutual account in the commission agency. I have examined the cases of the high rate of interest during the Cho-sun Dynasty and the Japanese control over Cho-sun as long as related with this issue. The issue I have wanted to study here is related with the history of law as well as the Commercial law. The law of Cho-sun Dynasty prohibited the high rate of interest, however it wasn't normative enough because of its self-contradiction and anti-legalism. The Cho-sun Dynasty couldn't solve this problem, though some Confucianists criticized this. The Japanese cunning merchant plundered the Korean poor men by means of the loan of the high rate of interest. The Act(I-Sik-Gyu-Rye) related with the high rate of interest(including the commission agency:Gaek-Ju) during the Dae-han Empire was not efficient to control this high rate of interest. The two cases of the high rate of interest studied here show the the traces of this long continued problem.

발행기관:
한국법사학회
DOI:
http://dx.doi.org/10.31778/lawhis..35.200704.109
분류:
법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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